목회칼럼
‘긴급한 일의 횡포’
살면서 경험하게 되는 것 중 하나는 ‘의도하지 않은 일’이 꽤 많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번 한주간이 그런 주간이었습니다. 계획하기로는 3024 강력기도운동이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였습니다. ‘기도’에 강력하게
집중해 볼 계획이었습니다. 주말에 대각성집회도
있고, 교우들을 위한 중보기도에 대한 강한 부담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주일 내내 철야기도를 하면서 ‘기도에 대한 강한 몰입’을 시도해 보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 계획을 밀고 나가기에는 역부족이다 여겨질 만큼
많은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엄습해 왔습니다. 원래 여러가지 일을 동시에 처리하는 멀티태스킹과는 거리가 먼 스타일인지라, 허둥지둥대는 분주함으로 오히려 기도에서 한발치 먼 한주간을
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가지 일을
처리했나 싶으면 예상치 않은 또 다른 일이 저의 조급함을 부추기는 이 희한한 현상 앞에서 급기야 탈진마저 경험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금요일 새벽. 몸을 가누기 힘들 만큼 몸이 무겁습니다. 높고 높은 고층 빌딩의 난간에서 다리를 헛디뎌
그만 까마득한 아래로 추락하는 듯한 느낌입니다. 강력기도운동 기간 모든 새벽예배의 메세지를 전하겠다는 일념이
있었지만, 오늘은 그 약속마저도 지키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3024 강력기도운동의 최일선에서 기도를 이끌어 가겠노라는
의지를 불태웠었는데… 제대로 그 계획을
이행하지 못한 애통하는 자책감(?)으로 천근만근 무거운 무릎을 억지로 굴복시켜 봅니다. 이 한주간 가장 중요한 일 ‘기도’가 왜 가장 중요한 취급을 받지 못했을까… 머리 속에 이 한가지 질문만이 맴돌 뿐입니다.
제자반에서 필독서로 읽고 있는 ‘찰스 험멜’의 ‘늘 급한 일로 쫓기는 삶’이란 책자가 생각납니다. 이 책의 원제는 ‘긴급한
일의 횡포’입니다. 저자는 ‘긴급한 일’과 ‘중요한 일’을 나누어 다루어야 함을 역설합니다. 일반적으로 ‘중요한
일’은 ‘긴급한 일’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알고보면 긴급하다고 꼭 중요한 일은 아닌 경우가 다반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찰스 험멜’은 그의 저서 제목을 ‘긴급한 일의 횡포’로 잡은 것입니다. 긴급한
일은 중요한 일마저 잊도록 만드는 ‘횡포’를 부리는 악질(?)이라는 뜻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정말 이번 한주간은 ‘긴급한 일’에 의해서 ‘횡포’를 당한 것 같습니다. 긴급한 일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긴급한 일인 ‘기도의 시간’을 빼앗아 도주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정직하게 생각하고, 또 되새겨 보니 긴급한 일로부터 ‘기도의 시간’을 강탈당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긴급한 일’의 위력 앞에 제가 지레 겁먹고 자진 반납했다는 것이 더 솔직한 표현이 될 듯 싶습니다. ‘긴급한 일’로 부터 횡포를 당했다는 것은 변명에 불과합니다. ‘긴급한 일’의 허세
앞에서 기가 눌려 가장 긴급한 일인 ‘기도’를 포기해 버린 것이 더
정확한 말이 맞습니다.
늘 ‘긴급한 일’은 중요한 일을 강탈해 가는 ‘횡포자’로 여겼는데 이제야 발견하는 것은 ‘긴급한 일’은 그런 횡포를 부릴 수 있는 능력조차 없다는 점입니다.
긴급한 일은 횡포자처럼 허세를 부리기에 그리 보일 뿐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허세 앞에 의기소침해 있었던 제 자신이었습니다.
속이 많이 상합니다. ‘긴급한 일’의 허세 앞에 기가 눌려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긴급한 일인 ‘기도’를 자진반납했다니… 무거운 무릎을 꿇고 가장 중요한 일 ‘기도’를 다시 되찾아 오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아셨는지 성령께서 많이 위로해 주십니다. 그래도 이런 허한 마음에 위로가 되는 중요한 포인트. “이제라도 깨달았으니 다행이다” 마틴 루터는 할 일이 너무 많아 바빠지자 기도의 시간을
오히려 더 늘렸다고 했습니다. 마틴
루터의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은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하는
개념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앞으로 ‘긴급한 일’ 앞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절대로 자진 반납하지 않으렵니다.
다시 기도의 자리로 돌아오며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